LDR034 : 두 개의 세계
진실 속의 일상 생활이란 생긴 그대로의 상황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상황 혹은 현재의 환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데 허락하신 재료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퍽이나도 자비하신 어떤 신이 우리가 우리들의 행위의 결과로 고통을 받지 않도록 우리가 저지르는 과오를 바로잡아 주신다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읍니다. 친구를 원하시며 첫 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독생자 예수처럼 자녀들을 원하시며, 주님이나 혹은 자기자신들을 자유로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우리가 만든 혼란 속에서 살도록 상황을 정리하셨습니다. 우리들은 말이나 칼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입히면 우리는 그 결과 생기는 소외와 스트레스 속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이기심으로 키우면 우리는 무책임한 세대의 혼돈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타락하는 세계의 역설은, 우리들의 창조주께서 이 모든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우선 그 타락한 세상을 그의 독생자 예수 안에 창조하셔서 하나님 자신이 그런 세상의 결과를 참고 견디며 시공적으로 유한한 세계 밖으로 바꾸어 놓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테레사 수녀와 콘크리트 판을 뚫고 나오는 어린 꽃이나, 혹은 가스실의 독일 간수에게 “그를 내버려 두세요. 나의 귀한 오빠는 나와 함께 죽게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어린 유대인 소녀에게서 얼핏 보기에도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일 속에서 이러한 진실을 표명합니다. 이 모든 것이 창조주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참된 세상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 반면에 우리들은 자신들에게 의존하여 조성해 놓은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가요? 그것은 우리가 그 차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마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삶과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참된 현실 속에서 사는 삶 사이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타인의 따르는 무리들에게 “종은 주인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친구라 불렀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이유인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에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 안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없는 혹은 하나님 밖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세속의 일시적인 외형적 종속성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그 결과를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별개의 격리된 인간으로서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절단된 세상, 왜곡된 현실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예견하시고 우리들이 우리 자신이나 세상의 타락을 바꾸어 놓을 능력이 없음을 아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가 거하시는 시간을 초월한, 그러면서 순간적인 시간에 이 세상의 혼란을 파하시고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현세와 함께 나란히, 또는 현세를 초월하여, 또는 현세의 주변에 현존하는 최종적인 진실인 것입니다. 그것이 첫 세기에 있어서 예수의 죽음에 의하여 이 시공의 세계에서 표현된 우주론적 변화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안에 계시며 세상을 자신에게 맞도록 조화시키셨습니다.” 즉, 원래의 계획대로 세상을 개조하고 혁신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 속에 존재하면서 여기 우리들의 현세 속에서 그 영원성의 진실을 표현해 줄 수 있는 신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우리들 각자의 자아와 자율적 생명의 힘을, 살면서 체험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를 부여 받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들은 어떤 사람이 뜻 밖에도 죽을 병에서 회복되거나 혹은 재정적 어려움이나 사회적 상황이 잘 풀려서 저절로 해결되는 것처럼 보일 때 세상에서 기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들이 우리들의 태도를 고친 후에 그러한 것을 보게 되어 성공의 결과를 병립하는 세계에 보다는 긍정적인 사고의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